호메로스 일리아스 후기

2025. 6. 13. 17:41독서

 
<일리아스>라는 제목은 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인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했으며, ‘-as’는 ‘~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 마지막 50일 남짓한 시기만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하여 헥토르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는 곧 트로이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서사의 전개는 트로이 성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고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립, 인간과 신의 갈등, 영광과 죽음이라는 대치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트로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비극적 흐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일리아스인 이유다.

작품을 읽는 동안 골치 아팠던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인물을 지칭하는 표현이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를 ‘펠레우스의 아들’이라 부르고, 헥토르나 다른 인물들 역시 다양한 별칭으로 불려 처음엔 누가 누군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신들 역시 각각 지지하는 진영이 다르고, 별칭 또한 여러가지라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또한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일부만을 다루기 때문에, 전쟁의 발단이나 원인을 별도로 찾아보지 않으면 서사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읽는 것만큼 배경 공부에도 많은 시간이 든 작품이었다.

일리아스에는 인물의 행동이나 전투 장면을 동물이나 자연물에 비유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마치 산속에서 야생 멧돼지 두 마리가 떠들썩하게 뒤쫓아오는 사람들과 개 떼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같은 문장은 전투의 분위기를 전하기는 하나, 오히려 몰입이 방해됐다. 또, “앗사라코스는 카퓌스를 낳으시고, 카퓌스는 앙키세스를 아들로 낳으셨소. 또 앙키세스는 나를 낳으시고 프리아모스는 고귀한 헥토르를 낳으셨소”라는 식의 족보 나열은 성경 비슷한 묘사처럼 느껴져 흥미로웠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화자의 개입이다. “하지만 신이 아닐진대, 내가 어찌 그것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구절을 읽다가 이건 작가의 말인가싶어 지피티에게 물어봤다. 지피티가 답변하길, 화자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뮤즈의 영감을 받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모든 걸 다 알지 못하지만, 신의 계시를 통해 이 서사를 노래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신의 계시로 서사시를 썼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신들의 개입만 없었어도 전쟁은 금방 끝날 것 같다는 거였다.
신들은 인간들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편드는 진영을 아주 노골적으로 돕고, 주요인물들이 절대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ㅎ 그래서 전쟁이 길게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답없는 신은 제우스다. 그는 테티스의 부탁을 받아 아킬레우스의  쫌생이같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고, 나중에는 또다시 입장을 바꿔 트로이를 외면한다. 또, “신들이 서로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는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라는 묘사가 있는데..어휴,,싸이코패스도 아니고, 제우스는 정말 만악의 근원이다.

일리아스의 신들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이 절대선, 전지전능한 개념이 아니었다.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않는 존재일뿐, 감정, 욕망, 분노, 편애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강하지만 죽음이라는 운명의 비극을 절대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덜 깊은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더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신이 하찮게 묘사되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하계의 왕 하데스가 밑에서 겁에 질려 고함을 지르며 옥좌에서 뛰어올랐으니...”라는 문장은 죽음의 신도 공포에 질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초반부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인간에게 공격당해 울고, 아레스가 피를 흘리며(신의 피는 하얀색이라고 한다) 투덜대는 장면도 묘사된다. 현대의 유일신, 절대신과는 다른 개념이 재밌었다.

솔직히 나의 얕은 지식과 통찰력으로는 이 작품이 왜 오늘날까지도 고전으로 추앙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겐 그냥 전쟁을 묘사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다만 인간과 신의 관계, 절대적이지 않고 때때로 허접한 신들의 모습, 그리고 신화적 서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은 재미있었다.